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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왜 아프게 태어났어?" 노동부는 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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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그게 뭔데 l 태아산재법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등이 지난해 건강 손상 자녀 산재 인정을 포함하는 산재보상보험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산재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의 산업재해 인정 문턱을 높여 논란이다. 태아산재법은 임신 중인 노동자가 업무 중 유해인자에 노출돼 자녀가 선천성 질환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 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내용으로, 피해 자녀는 요양급여, 장해급여, 간병급여, 직업재활급여 등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노동부는 지난 17일 건강이 손상된 자녀에게 미치는 유해인자를 담은 산재보험법 시행령 개정령안을 입법예고했다.
입법예고안에서 지정된 건강 손상 자녀 관련 유해인자는 △바이러스·기생충·세균 같은 생물학적 인자 △태아에게 기형을 유발하거나 유발할 가능성이 높은 약물 인자 △화학적 인자(중금속·화학물질) △물리적 인자(고열작업·전리방사선) △그 외 자녀의 건강 손상과 의학적 관련성이 인정되는 유해인자 등 5가지다. 이 중 논란이 되는 건 화학적 인자의 협소한 범위다. 노동부는 입법예고안에서 화학적 유해인자를 납·카드뮴 등 17가지만 포함했다. 태아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알려진 화학물질 1484개의 1.1% 수준이다. 심지어 1995년 집단 생리불순·불임 등으로 산재 인정을 받았던 엘지(LG)전자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작업 당시 세척제로 사용한 2-브로모프로판도 제외됐다. 2-브로모프로판은 생식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독성물질이지만, 노동부는 ‘불임에 관련해서만 알려져 있다는 이유’로 포함하지 않았다. 노동부가 최소한의 유해인자만 인정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노동부는 입법예고안에서 의학적 근거와 대법원에서 인정한 사례를 반영해 유해 요인을 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태아산재를 처음으로 인정받은 제주의료원 사건에서 대법원이 유해 요인으로 판단한 간호사의 교대 근무, 심야 노동 등은 이번 입법예고안에 반영되지 않았다.
건강 손상 자녀의 산재 인정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제주의료원 사건은 2009년에 알려졌다. 당시 임신한 제주의료원 간호사 15명 중 5명은 유산하고, 4명은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자녀를 출산했다. 역학조사 결과 당시 간호사들은 장기입원 고령 환자를 위해 별도의 보호장구 없이 매일 400~600정의 알약을 갈아 가루로 만들었는데, 여기엔 임신부와 태아에게 유해한 약품이 54종이나 포함돼 있었다. 10년간의 긴 법정 다툼 끝에 2020년 4월 대법원으로부터 태아산재를 인정받았지만, 당시 산재법으로는 태아는 노동자로 인정되지 않아 노동 당사자인 간호사만 보험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태아산재법은 지난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협소한 유해인자 규정이라는 비판에 노동부는 “추후 의학적으로 밝혀진 유해인자를 인정할 수 있도록 포괄 규정을 마련했다”고 설명했지만, 산재 적용 대상과 유해인자 확대, 임신·출산 유무와 무관하게 모든 노동자의 재생산 건강권 보장 등으로 사회적 논의를 진전시켜야 할 시점에 되레 이를 후퇴시켰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사람들의 기대와 다르게 개정안을 통해 당사자들이 얻은 것은 ‘산재 신청을 할 수 있는 권한’뿐이었다. 판결을 기다린 간호사들도, 반도체 노동자의 2세 질환 직업병 피해자들도 근로복지공단의 판정을 기다리고 있다. 끝난 문제는 없다. 시작일 뿐이다.” 반도체 산업의 생식독성과 2세 질환 직업병 문제를 기록한 책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입법 이후를 묻고 있다. “나는 왜 아프게 태어났어?”라고 묻는 건강 손상 자녀의 질문에 노동부는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을까.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